경제공부 / / 2022. 11. 11. 11:02

경제 공부하기(산업혁명, 불경기, 경기 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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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산업혁명이라고 하는데 어떤 부분이 혁명일까? 증기기관이 가져온 변화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불이 물을 증기로 바꾸면 올라온 증기를 사용하여 기계를 움직인다.

 

증기기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석탄에 대해 알아둘 것이 있다. 석탄도 석유처럼 화석연료이다. 영국은 석탄이 풍부한 나라이다. 중세시대부터 영국인들은 비싼 나무보다 저렴한 석탄을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아무리 자원이 넘쳐났어도 1,700년 무렵까지 펌프질을 할 수 있는 자원은 사람의 노동력뿐이었다. 그래서 더 비싼 임금을 주고 노동자를 더 고용해야 했다.

 

증기기관의 발명이라고 하면 흔히 '제임스 와트'를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1712년에 철물상을 하던 '토머스 뉴커먼'이 인류 최초의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이 증기엔진은 석탄 광산에서 물을 퍼올리는 데 사용되었고, 드디어 불이 근력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 증기기관을 움직이려면 너무 많은 연료가 필요했다. 석탄 광산처럼 연료가 저렴한 곳을 빼고는 사람이 펌프질을 하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많이 소요됐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이따금씩 사용되고 있었다.

 

1760년대에 스코틀랜드 엔지니어 '제임스 와트'가 어디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효율적인 증기엔진을 설계했다. 기업가들이 이것을 직조기와 방적기에 활용하면서 공장이 세워지고, 수천 톤의 물건이 생산되었다. 맨 처음 사용된 것은 면직 방적기였다.

 

1807년 증기엔진은 선박에도 사용되어 물건 운송에 도움을 주었다. 1820년대에 드디어 철도가 등장했다. 그러면서 영국은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철도와 증기선, 공장을 만들려면 엄청난 물자가 필요했고 폭발적으로 수요가 팽창했다. 생산력이 팽창하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예를 들어 양모는 소변에 담그고 상한 우유로 표백해 세탁했다. 공장에는 양모가 산더미처럼 쌓여갔지만, 소변과 우유의 생산량은 한정적이었다. 이 위기 상황을 벗어나려면 더 효율적인 기술고 새로운 기술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대체재를 발명하기 위해 '화학 산업'이 새로 등장했다.

 

그리고 더 새로운 기술이 요구되었고,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들이 필요해졌다. 공장은 더 저렴하고, 질 좋은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를 축복하고, 곧 다가올 여유로운 미래를 꿈꾸며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불경기

 

하지만, 햇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생기는 법! 공장 노동자 한 명은 장인 노동자 여럿보다 더 많은 물건을 만들었다. 물건은 많아졌지만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이때 일자리를 못 구한 사람들은 분노하여 공장을 파괴하기도 했다. 일자리를 못 구한 사람들에게 현실은 가혹했다. (이전 포스트의 맬서스를 기억하는가? 그의 이론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은 부모의 잘못이다.)

 

그렇다면,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의 형편은 좀 나아졌을까? 그들 역시 힘들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애덤 스미스 포스트에서 언급했던 자유시장에서 임금 협상과정을 다시 복기해보자. 18세기 자유시장의 고용주들은 일꾼을 확보하기 위해서 서로 임금을 올려 경쟁했다. 하지만 19세기 공장에서는 수백 명의 노동자가 단 한 명의 고용주와 협상을 벌여야 했다.

 

노동자들은 저임금. 열악한 환경, 하루 18시간 노동을 받아들여야 했다. 1824년 12살 어린 나이에 구두약 공장에서 일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보면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기계들이 일을 줄였다고 하지만, 노동자들은 더 힘들어 지기만 했다. 때로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경기 순환 : 호황, 폭락, 회복

 

산업의 수요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것을 '호황'이라고 한다. 하지만 잘 팔리지 않는 때가 올 것이다. 만들어 놓은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면, 수요 부족이 확산된다. 그로 인해, 많은 공장과 산업이 문을 닫고, 경제가 폭락하는 것을 경제공황, 경제 불황이라고 한다. 이는 경기침체로 이어진다.

 

불황은 참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이 물건을 원하지 않아서 불황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항상 더 많은 물건을 가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갖고 싶은 물건을 살 돈이 없다면? 사람들은 공장에서 물건을 많이 만들어내도, 그것을 살 만큼의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정부가 무작정 돈을 더 찍어낼 수는 없다. 19세기는 '금 본위제'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다. 당시에는 지폐를 금으로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었다.

 

'금 본위제'는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합리적으로 보인다. 지폐는 중세시대에 금고에 보관하고 있는 '금(Gold)'의 청구서로 시작되었다. 사실 금이 있었기 때문에 지폐는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폐나 금화를 비롯해 다른 화폐 형태를 인정한 이유는 동일하다. 다른 사람들도 인정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 본위제'에서는 금의 공급량에 맞춰 통화량을 조절해야 했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한지 아닌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제도하에서 화폐를 더 찍어낼 방법이 생겼다.

 

 

부분지급준비금

 

'부분지급준비금'이라니까 어려운 말로 들리지만, 사실 우리가 자주 가는 은행들이 이 제도를 운영한다. 고객이 은행에 돈을 보관한다. 은행은 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서 돈을 번다. 은행은 예금액 전부를 빌려줄 수 없다. 만일을 대비해 그 일부인 약 20% 정도를 예치하고 그 나머지인 80%를 빌려준다.

 

예) 누군가 1천만 원을 은행에 예금 → 은행은 20% 예치, 나머지 8백만 원은 타인에게 돈을 빌려줌 → 돈을 빌린 사람은 증기기관을 구입 → 증기기관 판매자는 8백만 원을 은행에 예금 → 은행은 20% 예치, 나머지 640만 원은 또 다른 사람에게 빌려 줌 → 빌린 사람은 이 돈으로 또 은행계좌를 개설 (이후 반복)

 

만일 은행이 이 돈을 계속 빌려주고 그 돈이 모두 은행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가정하면, 원금 1천만 원은 4천만 원의 계좌 수익을 창출한. 은행계좌의 5천만 원은 현금 1천만 원과 대출 고객에게 받은 차용증 4천만 원을 합한 금액이다.

부분지급준비금

 

고객들은 언제라도 원하는 시점에 자신의 돈을 찾을 수 있다. 아니면 수표를 발행해 다른 사람이 돈을 찾게 할 수 있다. 은행계좌는 이렇게 현금처럼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은행은 현금 1천만 원을 현금 5천만 원으로 바꾸었다.

 

이런 변신이 가능한 이유는, 은행이 빚을 돈으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무척 기분 나빠하기도 하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사실 돈은 빚이다. 돈으로 용역과 상품을 살 수 있다. 거꾸로 돈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제공해야 할 노동력과 상품이 있다는 의미이니 재무적 관점으로는 '빚'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부분지급준비 제도는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 사람들 모두가 한꺼번에 돈을 찾지는 않으니까 아직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은행 금고에는 특정한 날짜의 예금 지불에 대비해 일정량의 돈이 보관되어 있다. 대신, 우리는 수표를 발행하거나 전자결제 방법을 사용한다. 돈은 은행에 계속 두고 그 소유권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19세기에는 헛소문이라도 은행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돌면, 뱅크런(예금인출 사태)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사람들은 본인이 예금한 돈을 내놓으라고 난리였고, 은행은 더 많은 돈을 벌어주겠다며 예금인출을 제한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사람들은 상품을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 구매하지 못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이런 공황상태로 인해 불황이 올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불황이 전적으로 뱅크런처럼 재정적 딸꾹질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불황의 원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이 게을러서라고 했고, 노동자는 공장 문을 닫던 그 시점부터 모두가 일시에 게을러져서 불황이 생긴 거냐며 반발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벗어날 해결책은 분명히 존재했다. 소비가 줄어들어 불황이 생겼다면, 자국 내 소비를 벗어나 외국에서 판매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영국은 19세기에 자유무역을 밀어붙였다. 중국은 교역을 막았지만, 두 차례의 전쟁으로 문이 활짝 열렸다. 영국은 세계 어디라도 자국의 무역상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들을 저지하는 누구라도 공격했다. 19세기 초, 영국은 인도를 점령했다. 이후 바로 영국 제품과 경쟁하던 인제 제품 생산이 금지되었다. 이런 게 자유무역이라고? 대영제국 건설로 끝나지 않고 다른 문제들이 생겼다. 영국은 식민지에 수출을 하고 싶었지만, 식민지인은 영국 때문에 직업도, 돈도 사라져 버려 구매력을 잃었다. 그리고 1820년대에 들어서부터 유럽 대륙과 북아메리카 전역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경쟁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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