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한 분배 , 사회주의
애덤 스미스의 자유경쟁이 일으키는 문제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 공장은 계속 늘어나는데, 왜 많은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 놀고 있는가?
- 어떤 노동자는 과로로 죽어가는데, 어떤 노동자는 일자리가 없어 굶는가?
- 왜 대량생산으로 옷 값이 저렴해졌는데, 정작 그걸 만든 노동자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있을까?
그들은 부의 혜택을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렇다 사회주의자!
협력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서로의 생각이 각기 달랐고, 본인의 계획이 옳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현실에서 직접 실행해보지 않은 채 끝없이 논쟁만 거듭했다. 단 한 사람의 사회주의자가 자신의 손에 흙을 묻혔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아버지 소유의 공장이 있는 독일을 떠나, 영국 섬유산업의 중심이자 세계 최대의 공업도시 '맨체스터'로 떠났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슬럼가를 샅샅이 관찰한 엥겔스는 그 내용을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황」이라는 글에 요약했다. "매우 열악합니다"
1844년 유럽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엥겔스는 1847년에 폭락이 다시 올 것이며, 이것이 조만간 혁명을 촉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예고대로 경기가 폭락했다. 1848년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그 해 엥겔스는 독일의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는 사회주의자를 말하는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이 선언은 역사의 모든 이론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요약했다.
"역사는 사실상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19세기 부르주아지(자본가)는 농경사회를 송두리째 파괴했고, 부르주아지는 모든 자본을 거머쥐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프롤레타리아(극빈한 대중)로 전락했다. 사유재산을 없애자는 주장은 꽤 충격적일 수 있지만, 사회 구성원의 90%는 이미 사유재산이 없다. 프롤레타리아가 된 모든 사람들이 단결하고, 부르주아지는 몇 명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몰아내려고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어느 시점이 되면 프롤레타리아(곧 모든 사람)는 모두의 이익을 위해 공장을 가동할 수 있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하지만, 노동자들은 단결하지 않았고, 1848년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올 것임을 증명하겠다며, 영국으로 탈출했다. 그는 증명을 위해 2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미국의 민주주의
독립전쟁 말기에 보았듯, 미국의 시작은 불안했다. 최초의 전부인 대륙회의는 세금을 부과할 권한이 없었고, 그래서 누군가의 독재가 불가능했다. 아울러 다른 일도 할 수 없게 막혀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표로서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었다.
1789년 미합중국 헌법은 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초대 재무장관인 해밀턴은 돈을 가진 사람들이 통치하길 바란 반면, 초대 국무장관인 토머스 제퍼슨은 민주주의를 꿈꿨다. 제퍼슨은 노예 소유주였지만,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정치적 독립을 원한다면, 경제적 독립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자기 농장을 가진 농민들에게만 해당되어 실제 현실과는 괴리가 있었다.
서로 생각이 달랐던 제퍼슨과 해밀턴은 각자 정당을 만들었다. 해밀턴의 연방당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제퍼슨의 민주당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존재한다. 1800년에 제퍼슨은 대통령이 되었고, 1804년에 부통령 애런 버가 결투장에서 해밀턴을 총으로 쐈다. (해밀턴은 당시에 불륜 스캔들, 꼬장꼬장한 성격 등으로 정치적 적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정착민에게 저렴한 값으로 땅을 주는 '제퍼슨의 토지개혁'이 실시될 수 있었다. 저렴한 토지는 노동자의 협상력이 높아진다는 의미와 통한다. 임금이 높은 노동자가 두려움에 떠는 노동자보다 더 성실하고 일을 더 잘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최저급여보다 많이 주는 것은 효율적이었고, 애덤 스미스도 그렇게 말했다.
또한, 높은 임금은 고용주들이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게 했다. 이를테면, 모든 제품을 하나씩 만들기보다 모양이 같고 호환 가능한 부품을 조립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1830년대에 미국의 제조업체와 해운업체는 영국과 경쟁이 가능할 정도로 발전을 이루었다. 미국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경쟁력을 높인 것이다.
이렇듯 기회가 주어지자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도 성공할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북부에서는 이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남부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남부인들은 관세, 세금, 은행만 탓했고, 중요한 명분을 간과했다.
자유의 땅 vs 노예제도
노예제도는 인간도 그저 상품중 하나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재산권을 행사하게 내버려 둘 때 발생한다. 노예 노동은 결코 생산적이지 않다. 채찍을 들어 타인에게 일을 시킬 수 있지만, 잘하게 할 수는 없다. 애덤 스미스는 노예 노동은 유지비용만 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비용이 가장 많이 든다고 했다.
미국 헌법의 입안자들은 노예제도를 금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1790년대에 목화송이에서 씨만 뽑아내는 조면기가 발명되면서, 목화의 세척 속도가 백 배 정도 빨라졌고, 목화 공장의 수가 급증했다. 목화에서 수익이 많이 나면서 노예 경제를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노예제도가 이윤을 많이 낼수록, 노예 소유주들은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 문제에 둔감해졌다. 흑인은 노예노동에 적합한 품종이며,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노예제도를 다른 주로 확산시키려고 시도했다.
이에 자유노동자들과 농민들이 반기를 들었고, 새로운 정당인 공화당을 만들었다. 1860년, 공화당의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남부는 분리를 선언하며 북부를 공격했고, 이것이 남북전쟁의 시작이었고, 1865년 북부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난다.
경제전쟁
남부는 목화만으로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전쟁터의 군대를 유지하기도 버거웠다. 북부는 돈을 찍어내서 필요한 것들을 사들였다. 북부의 기업가들은 꼼수를 부려서 정부를 속였다. 기업가들은 북부 군대에 못 쓰는 화약, 상한 고기, 망가진 폭탄, 비가 오면 녹는 군복을 보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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