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정책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3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호전적인 연설을 했다.
"인류의 부를 거래하고 지배하는 사람들이 고집과 무능 때문에 실패했고, 그 실패를 인정하고 물러났습니다. 저들에게는 비전이 없고, 비전이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살아가지 못합니다. 금융업자들은 문명의 전당에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상석에서 도망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전당을 고대 신회에 따라 회복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뿐입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집권하고 첫 100일 동안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행함으로써 비상사태를 즉각 멈췄다. 모든 은행의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고, 돈을 실업자들에게 주고, 월스트리트를 통제하고 금본위제를 달러로 대체한 후, 은행 자산이 보증하는 20억 달러를 찍어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역사에 길이 남을 정책이 등장했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은 민간 기업에 상당한 자유를 보장했다. 하지만 새로운 제도를 통해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처했다. 예상되는 문제점은 민간 기업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공공사업 촉진국(WPA), 공공사업 관리국(PWA), 시민 보존 청년단(CCC)이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다리, 터널, 공원, 숲과 같은 공공에게 유용한 것들을 만드는 일이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실업보험이 얼마 동안 소득을 보전했다. 하지만 일을 할 수 없는 노동자들에게는 민간 기업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사회보장국(SSA)에서는 노령연금과 장애인 보험을 제공했다. 사회보장국은 유족 수당과 실업보험도 집행했다. 당시 통상적으로 '사회보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노령연금이었다. 자유시장에서는 농산물 가격이 요동을 쳤기 때문에 농부들은 돈을 벌기가 어려웠다. 농업 조정국(AAA)은 작황이 좋을 때 농작물을 사두었다가 좋지 않을 때 판매해서 식량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민간 기업과 관련된 또 다른 금융 문제는 저축을 어떻게 실물투자로 전환하는가였다. 투자는 수익이 천천히 돌아오는 반면, 투기는 잘되면 즉시 큰 이윤을 낸다. 따라서 투자에 쓰일 돈이 자칫 투기로 빠질 위험이 컸다. 그래서 뉴딜정책은 금융을 규제했다. 예를 들어, 연방 예금보험공사(FDIC)는 은행이 도산하면 예금자의 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보증했다. 그 대신에 은행은 분별 있게 투자해야 했다. 그리고 투기만 문제가 아니었다. 1920년대, 19230년대의 진짜 문제는 은행들의 공공연한 사기 행각이었다. 앞에서 본 상업은행은 예금을 받고 그 돈을 빌려주면서 이윤을 창출한다. 투자은행은 구매자와 주식, 채권(일정기간 후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는 차용증)의 발생자를 연결시켜주는 업무를 한다. 1930년대에 한 은행이 종종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겸했다. 대공황기 동안 은행들은 자신들의 불량 투자를 투자은행의 고객들에게 떠넘겼다. A회사가 곧 부도가 날 예정이라면 고객에게 A회사의 채권이 수익률이 좋다면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글라스-스티걸법(1933년)이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불리시켜서 이런 유혹을 깔끔하게 차단했다. 이런 예시가 규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이다. 수많은 감독관들이 복잡한 규정을 강제로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보상과 공적인 이익을 동시에 보장하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월스트리트에 대해서는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주재하는 또 다른 규제안이 시행되었다. SEC의 초대 위원장은 조지프 케네디가 맡았는데, 그는 1920년대 금융계 거물 중 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추잡한 월가의 사람이라고 걱정했지만, 프랭클린은 그가 월가의 모든 꼼수를 꿰고 있기 때문에 그를 자리에 앉힌 것이었다. 그 결과 금융계가 고분고분해졌다. 이후 40년 동안 한 차례도 대규모 거품이나 폭락이 없었다. 은행가들은 '3-6-3'법칙을 준수했다.
뉴딜정책으로 많은 기관이 탄생했고, 이 모든 정책에 돈이 필요했지만, 대공황기를 거치면서 세금 수입이 엄청나게 감소했기 때문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정부채권을 발행하여 돈을 빌렸다. 이런 정부의 적자 재정지출에 정통파 경제학자들은 무척 당혹스러워하며 세금을 거두어들인 후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루스벨트는 지급 돈을 쓰지 않으면 세금으로 낼 돈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며 강행했다. 경제학자들을 당황하게 만든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4년 금 본위제를 포기하고 달러 본위제를 시행했다. 보석을 제외한 금 보유는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방식이 진정한 의미의 금본위제인데, 루스벨트의 정책은 주류 경제학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했다. 부자들이 무력으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노동조합을 진압하지 못하게 했다.
대공황은 노동조합으로서는 분명 호시절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궁지에 내몰렸다. 대공황은 많은 노동자들을 급진적으로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급진적인 전략을 사용했다. 공방 밖에서 다른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을 가져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공장을 점거했고, 1936년 노동자들이 제너럴모터스의 핵심 공장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그들이 경찰과 대치하자 루스벨트는 군대를 보냈다. 결국 제너럴모터스는 손을 들었다. 노동자들은 거대 자동차 노동자연맹(UAW)을 결성하고, 적정한 임금과 노동시간을 얻어냈다. 다른 거대 산업 노동자들도 이내 노동조합을 결성해 8시간 노동을 쟁취했다. 이후 8시간 노동은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1938년에는 시간 외 근무수당이 법안으로 공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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