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공부 / / 2022. 11. 20. 20:24

경제 공부하기(공산주의, 경기 호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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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플랜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람들은 감독받을 때 사업 경제가 놀라운 능력을 펼치는 것을 목격했다. 만약 이런 노력이 병원이나 학교처럼 좋은 곳에 쓰였다면 어땠을지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전시가 아니라면 민주주의 체계에서 사람들에게 협력을 강요할 수 없었다. 1922년 이탈리아를 접수한 사회주의 당원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해법이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버리고 국가지상주의를 주장했다. 모든 것은 국가를 위해 있고, 그 어떤 것도 국가에 맞서거나 그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무솔리니는 이 해법을 일종의 전쟁 경제를 영구적으로 유지하는 '파시즘'이라고 불렀다. 단 항명의 최고 지도자가 통제하고, 대형사업은 밀실에서 진행하며, 무력으로 억압하고, 선전과 검열이 일상화된 생활. 오늘날 무솔리니의 해법은 난센스로 보이지만, 당시 그는 근대적이고 역동적인 지도자로 생각되었다. 1920년대에 자본주의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독재자들이 일시에 등장했다.

 

 

공산주의 : 러시아 혁명, 소비에트 연방

 

레닌이 권력을 잡았던 러시아에서는 혁명으로 인해 어떤 변화를 기대했을까? 엥겔스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국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했지만, 레닌은 권력을 좋아했다. 레닌은 러시아의 절반이 다른 세계의 지원을 받아 자신을 제거하려 들었기 때문에(러시아 내전) 발을 편히 뻗고 잠을 잘 수 없었다. 러시아식 '공산주의'는 반대파를 완전히 제거하는 '전쟁 경제'를 의미했다.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했으나, 승리를 거둔 공산당에게 남은 것은 배고프고 분노한 국민들뿐이었다. 

 

1921년 레닌은 공산주의 혁명가답지 않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소규모 기업에 많이 개입하지 않고, 농부들이 기른 작물을 직접 팔 수 있도록 했다. 권력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철도, 중공업, 은행, 광산은 직접 관리했다. 혼합경제 체제를 선택한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효과를 발휘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약칭 소련)이 일어섰다. 하지만 1924년 레닌이 사망하면서, 그가 그토록 경계하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공산주의 국가의 등장에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했다. 

 

 

월스트리트의 복수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적색 공포'와 부수적인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래서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워런 하딩'이 당선되었지만, 그는 루스벨트가 아니었다. 1923년 임기 도중 숨을 거두자, 부통령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지만 여전히 대통령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재무장관에 임명된 카네기 은행의 '앤드루 맬런'이 대통령 업무를 수행했다. 그래서 '멜런의 사무실에는 대통령이 셋'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멜런의 정책은 일관되었다. 재무부의 주요 사업을 자신과 친구들에게 넘겨주는 일이다. 조세감면, 이민 낸 세금 환불 등. 쿨리지 대통령은 부정을 멈추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나태는 경기 호황이 시작되면서 도리어 지혜로 비추어졌다.

 

 

경기 호황, 자동차의 대중화

 

수많은 기술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면서 경기가 호황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왔으며, 이 호황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1885년 벤츠에서 일반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고 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비싼 사치품이었다. 이때 괴상한 생각을 가진 '헨리 포드'가 등장했다. 1908년 포드는 가격이 850달러도 안 되지만, 쓸 만한 자동차 모델 T를 만들었다. 주문이 빗발쳤고,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공장은 이전의 조립라인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조립라인의 노동은 상당히 끔찍했다. 포드 자동차의 노동자 절반이 매달 그만두자, 1914년 포드는 노동자에게 하루 8시간 노동과 5달러의 임금을 지불했다. 그 당시 철강 노동자는 하루에 12시간 일하고 1달러는 받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것을 '경제 범죄'라고 규정하기까지 했다. 

 

포드의 일단 5달러는 단지 자비심에서 나온 엉뚱한 생각이 아니었다. 조립라인에 노동자를 붙들어둠으로써 생산성이 증가했고, 차 한 대당 생산비가 떨어졌다. 포드는 그 수익을 자기 주머니에 넣는 대신 자동차 가격을 인하했고, 모델 T는 마침내 30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판매량 증가 → 규모의 경제 → 가격 인하 → 판매량 증가) 포드의 괴상한 생각은 안 좋은 쪽으로 빠질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연도가 바뀌어도 포드 자동차는 똑같은 1908년형 모델에 색도 마음대로 고를 수 없었다.

 

포드의 경쟁사 일부가 제너럴 모터스(GM)로 합병되었다. 그들은 고유 자동차 모델을 유지함으로써, 고객에게 쉐보레에서 최고급 캐딜락까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GM사가 내놓은 새로운 자동차 때문에 포드의 모델 T(나중에는 모델 A)는 구식이 되어버렸다. 회사가 고전하는 동안, 포드는 깡패들을 모아서 노동자를 진압하고 음모론을 퍼뜨렸다. 어찌 되었건 1920년대 말에는 미국 가구의 절반이 자동차를 갖게 되었으니, 헨리 포드는 자동차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했다. 

 

 

 

공산주의, 경기호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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