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이 이은 도시 노동자의 고난
미국에서는 농부들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농부가 어려움을 겪자 산업 노동자들도 협상력을 잃었다. 심지어 외부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새로운 구직자들로 인해 산업 노동자들의 협상력은 더욱 악화되었다. 대기업은 원자재 관리하듯 노동력도 관리했다. 피츠버그 제강공장은 하루 24시간, 1주 일 가동되었고, 공장 노동자들은 2교대로 일했다. 1주 동안 쉬지 않고 꼬박 12시간씩 일했다. 그로 인해 화난 노동자들은 외부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이민자를 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사리판단이 명확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진정한 싸움을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여 고용주들은 민병대를 통원해 파업을 깨뜨리려 시도했다. 이 당시 철도업계의 거물 '제이 굴드'는 이런 말을 했다. "노동자의 절반이 죽더라도 아직 절반이 있으니 일을 시킬 수 있다." 말 그대로 노동력을 원자재의 하나로 여기는 발언이었다. 민병대 진압이 실패하자, 군대가 투입되었다.
농촌도, 도시의 공장지대도 일반 노동자들이 살기엔 어려웠다. 결국 사람들은 미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초거대 기업의 무법지대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국가의 법제도를 통한 해결책을 바랐다. 하지만 1866년 대법원은 헌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국가의 통제력을 무력화했다. 기업은 '법인'이고 하나의 '사람'이므로 돈을 벌 수 있는 헌법적 권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정부에 항의했다. 1887년 의회는 주간 상거래를 규제하기 위하여 주간 통상위원회를 설치하고 철도를 굴복시키려 시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초우량기업들은 이 법을 비웃었지만, 1890년 의회는 가까스로 '셔먼 독점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안타깝게도 이 법은 독점기업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탄압할 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 경찰은 노동조합이 거래를 제한하는 음모라고 주장하며 노동조합원들을 잡아들였다.
대통령은 법을 집행할 권한이 있었지만, 19세기 당사의 대통령은 무기력했으며, 화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더 이상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 기업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정부였다.
기업들은 빠른 속도로 국민의 주인이 되어갔고, 공산주의는 평화와 조직된 정부를 혐오하면서 위협하고 있다. 한데 부와 자본이 결합된 공산주의, 자유로운 제도가 가지는 정의와 진실성을 잠식시키는 지나친 어리석음과 이기심의 팽배는 억압당하는 빈민과 고된 노동자의 공산주의보다 더 위험하다고 '그로버 클리브랜드' 대통령은 말했다.
1901년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새로운 대통령의 등장 : 루스벨트
루스벨트 대통령은 공정 거래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모든 것을 가진 부자들과 공정한 거래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큰 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루스벨트는 몇몇 트러스트를 깨트리고, 기업으로부터 공유지를 회수하고, 철도요금도 단속했다.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이 산업가들과 대화하기보다 밀어붙이는 편이 훨씬 쉬웠다. 당시에 필요했던 것은 반드시 이루겠다는 정치적 의지였다. 루스벨트도 정의로웠지만, 그가 재임하는 동안 '정의'가 득세했다. 거름을 뒤지고 다니는 언론인들 덕분에 사회의 추악한 일면이 알려졌고 사람들은 분노했다.
루스벨트의 친구인 사진작가 제이컵 리스는 뉴욕 슬럼가를 취재하다가 악덕 집주인들 중 상당수가 건물을 관리할 여력이 있는 부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슬럼가 주민들은 깔끔한 집을 요구해도 될 만큼 많은 월세를 지불하고 있었다. 빈민가 문제는 지역에서 그리고 건축법규로 해결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근로 환경이 이렇게 끔찍하지 않았을 것이다. 1911년 뉴욕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 피복공장의 화재 사고로 146명의 노동자, 주로 여성과 소녀들이 불타 죽었다. 그들은 공장에 갇혀 있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미국 전역에서 개혁이 거세게 요구되었다.
문제는 한 지역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소고기 통조림을 먹고 죽었다. 그런데 이 소고기는 버지니아 사람이 캔자스 주에서 기른 것이고, 이것을 델라웨어에서 회사인가를 받아 뉴욕에 본사를 두고 코네티컷에 거주하는 사장이 운영하는 공장이 일리노이에서 캔에 담았을 수도 있었다. 폭로 작가인 업튼 싱클레어는 1906년 소설 '정글'에서 대형 육류공장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소고기에 쥐고기를 섞어 만드는 식이었는데, 루스벨트 대통령은 '식품의약 규제법(1906년)'을 제정하여 대응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새로운 유형의 자유주의자였다. 자유주의는 원래 개인의 자유를 최고 가치로 여기므로, 작고 약한 정부를 지지하지만, 20세기에 자유주의자들은 정부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그들의 자유를 위해서는 사적 권력에 맞서 균형을 맞출 공적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1909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태프트는 트러스트에 대한 압력을 유지했고, 트러스트의 시조 격인 '스탠더드 오일'은 1911년 해체되었다. 조각내고 나서야 그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트러스트의 단속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소수 대기업이 과점하는 산업은 사실상 독점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1년 현대시대에도 소고기, 핸드폰, 방위산업 등이 소수의 대기업이 과점하는 대표적인 산업이 있다. 독점방지법도 모건의 권력을 깨트리지는 못했다. 모건은 1912년 자산가치가 220억 달러에 달하는 기업을 통제했는데, 미시시피강 서부 지역을 전부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1912년 루스벨트는 개혁당에서 재출마했다. 개혁당의 당시 공약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명목상의 정부가 보이지 않는 정부에게 권한을 넘긴 것은 국민에게 헌신하지 못하고 책임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정부를 끝내기 위해서는 부정한 기업가와 부정한 정치인의 더러운 야합을 끊어내는 것이 먼저다."
루스벨트와 태프트는 공화당의 표를 분산시켰고,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윌슨은 몽둥이를 들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진보적 성향이어서 그의 행정부는 개혁을 시작했다. 소득세는 초고소득자 1%에서 7%로 확대. 독과점 형성을 예방하기 위해 '클레이튼 반트러스트 법(1914년)'을 발효시켰고, 이로 인해 독과점을 깨뜨리기가 훨씬 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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