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공부 / / 2022. 11. 21. 09:26

경제 공부하기(거품경제, 대공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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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경제


기업가들은 경기 호황의 일등 공신으로 추앙받았다. 대중은 전에 없이 이들을 흠모했다. 이렇게 사랑이 쏟아진 것은 우연은 아니었다. 기업들은 전시의 선전술(또 다른 말로는 홍보)을 터득했다.  이런 박수 소리에 불편한 사실들은 들리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엄청난 채무가 세계 경제를 짓누르고 있었다. 농부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노동자의 임금은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를 살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1920년대의 놀라운 혁신 중 하나인 소비자신용으로 물건을 사들였다. 이렇게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물건을 빌린 돈으로 구매했다.

 

이 모든 사실은 꽁꽁 숨겨진 반면, 주식시장의 다우존스 지수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물론 다우존스 지수가 경제는 아니다. 30개 대기업의 평균 주식값일 뿐이다. 1920년대에는 누구도 국내총생산(GDP)나 다른 포괄적인 경제수치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우존스 지수가 유일한 경제수치였고, 이 수치에 사람들은 환상에 빠져들었다. 다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거품(버블)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가격이 오르니까 무언가를 사들인다. 사들이니까 가격이 오른다. 이것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거품은 어떤 시장환경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때문에 거품이 발생했고, 20세기 미국에서는 비니 베이비 때문에 거품이 발생했다. 아이들 인형이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돈을 벌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렇게 값이 오르면 팔겠다는 기대 하나로 무언가 사들이는 행위를 '투기'라고도 한다.

 

거품을 수요-공급 곡선으로 나타내기는 어려운데, 거품에는 균형점이 없기 때문이다.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늘어나고 이런 이유 때문에 다시 가격이 재상승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렇게 부풀려진 값을 치르는 것은 바보 같아 보이지만, 더 멍청한 바보에게 떠넘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럴듯하게 생각될 것이다. 물론 거품이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1920년대 말에는 주식시장에 거품이 발생했다. J.P. 모건이 있었다면 조치를 취해 열기를 식혔을 것이지만 그는 이미 죽고 없었다. 공화당은 1928년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승리를 거둔 뒤에 행복감에 젖어 있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캘빈 쿨리지는 허버트 후버를 위해 뒤로 물러났다. 1929년 말 주식시장이 휘청거렸다. 심지어 수많은 투자자가 빌린 돈으로 주식을 매입했고, 주식시장은 무섭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은행은 불안감에 휩싸여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고, 투자자들은 돈을 갚기 위해 주식을 팔아야 했다 일부 투자자가 주식을 팔면서 주가가 약 30%가량 떨어지자 은행은 더 불안해졌다. 

 

 

대공황

 

처음에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행은 극도의 불안감에 싸여 대출을 전면 중단했다. 대출에 의존하던 많은 농부들과 기업들은 대출이 아니면 이전의 빚을 값을 길이 없었다. 그렇게 역사상 최악의 불황이 시작되었다.

 

1930년   1월(다우존스 지수 286) : 빚을 못 갚는 사람들은 압류당했고, 돈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는 듯했다.

1930년   4월(다우존스 지수 226) : 수많은 일자리들이 사라졌다.

1930년   7월(다우존스 지수 205) : 후버 대통령은 일반적인 경기순환일 뿐이라며 자신만만했다.

1930년 10월(다우존스 지수 165) : 후버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1931년   1월(다우존스 지수 172) :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위해 뒷골목을 헤맸지만 전혀 찾지 못했다.

1931년   4월(다우존스 지수 150) : 중산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31년   7월(다우존스 지수   97) : 의회가 미친 듯이 관세를 올리자, 다른 국가들이 보복을 했고 세계 무역이 무너졌다.

1931년 10월(다우존스 지수   78) : 1932년 가난과 공포의 해로 접어들었다.

 

- J.P. 모건 주니어 : "저는 공황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 헨리 포드 7.5만 명의 노동자 해고 몇 주 전 : "보통 사람들은 궁지에 몰려 방법이 없을 때가 되어야 날품팔이라도 하려고 한다. 하려고만 마음먹으면 할 일은 아주 많다"

- 앤드루 멜런 : " 대공황은 체제에서 썩은 상처를 도려내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1932년 실업률은 25%를 기록했다. 자선기금은 고갈되었고, 자존심이 센 노동자들은 구걸보다 자살을 선택했다. 돈이 씨가 마르면서 디플레이션(전반적인 물가 수준의 장기간 하락 현상)이 일어났다. 어떤 상품은 다른 상품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받았다. 농부들은 팔리지 않는 옥수수를 땔감으로 사용했다. 이 와중에 기업가들은 가격을 내리기보다 생산량을 줄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생산비 중 인건비는 확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을 낮추는 것보다 해고가 쉽다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소비자 대부분이 노동자이므로, 노동자들이 해고되거나 임금이 삭감되면 소비자들이 쓸 돈이 줄어들게 되고 결국 기업가들도 망하게 된다. 후버 대통령은 돈을 계속 퍼주었고, 맬런 재무장관은 이 돈을 자신을 비롯한 은행들에게 넘겼다. 말 그대로 앉아서 돈을 벌었다. 1932년 11월에 유권자들은 후버가 아니라 민주당의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테디 루스벨트의 사촌) 후보에게 표를 주었다.

 

1933년 3월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공식적인 업무를 시작하기 전까지, 분위기는 매우 험악해지고 있었다. "J.P. 모건 주니어가 세금을 한 푼도 안 냈다. 맬런은 재무장관 시절에 직원들에게 세금 탈루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등등의 말들이 나돌았다. 모든 믿음이 무너졌고, 농부들과 노동자들이 도시를 점거했다. 오하이오 주 데이턴의 시민들은 자급자족적인 도시국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나라는 몰락하기 직전의 상황이었고, 만약 미국에 무솔리니가 필요한 때가 있었다면, 이때가 유일했을 것이다. 시중의 유통되는 돈의 15%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집무실을 떠날 무렵, 미국 은행의 1/3 이상이 도산했다.

 

 

 

 

거품경제, 대공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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